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멀리 어딘가의 절에서 자시를 알리는 범종소리가 끊기듯 들려왔다.

그때,

기척이 있더니 발자국 소리가 가까웠다.

방문이 열렸다.

때를 같이하여 신립도 벽장문을 열었다.

활시위를 당겨 놈의 심장을 향하여 살을 날렸다.

놀랍게도 놈은 오른손으로 화살을 낚아 채는 것이었다.

이어 두 번째 살을 날렸다.

이번에도 놈은 왼손으로 자신에게 날아오는 살을 잡아 꺾어 버리는 것이었다.

마지막 한 개 남은 화살을 날렸다.

그러자 양손에 화살을 쥔 놈은 심장에 살이 꽂혀 억 소리와 함께 쓰러지는 것이었다.

괴물 같은 놈을 상대하느라 식은땀을 흘린 신립이 방안으로 내려와 보니 처녀는

정신을 잃고 까무라쳐 있었다.

처녀의 몸을 주무르기를 얼마나 했을까, 정신이 돌아왔다.

신립이 냉수를 한바가지 마시게 하자 큰 숨을 내쉬었다.

날이 밝았다.

처녀는 일어나 부엌으로 들어가 밥을 지었다.

안방에 의젓이 앉아있는 신립 앞에 처녀는 밥상을 사뿐히 내려놓았다.

수줍게 고개를 숙이고 신립이 수저를 놓을 때까지 한편에서 앉아있었다.

안도와 함께 핏기가 도는 처녀의 얼굴은 마치 선녀처럼 고왔다.

따끈한 숭늉까지 마신 신립이 떠날 차비를 했다.

이를 본 처녀는 눈물이 배인 얼굴로 자신을 거두어 달라 했다.

신립은 거절했다.

한양에 가면 조강지처가 있는 몸, 그럴 수 없다는 말로 잘랐다.

처녀는 울면서 애원했다.

자신을 구해 준 데다 비록 몸은 섞지 않았다 해도 이 남자는

지난밤에 처녀인 자신의 몸 구석구석을 주물렀다.

그런 신립에게 자신을 맡기리라 결심했던 것이다.

아니, 이런 산중에 자신 혼자서 살아갈 수 없잖은가?

이런 현실에서 이 남자 아니고는 자신이 의지할 사람이 어디 있단 말인가!

신립은 단호하게 처녀의 애원 뿌리쳤다.

뒤돌아 봄 없이 대문을 나섰다.

얼마를 걸었을까?

뒤에서 애절한 처녀의 울부짖음이 들려왔다.

아!

이럴수가,

집이 불에타고 있었다.

매정하게 뿌리치고 떠나가는 신립을 보고 처녀는 집에 불을 질렀다.

멀어져 가는 님을 조금이라도 더 보려 지붕에 올라가 화염에 쌓인 채 신립을 향해

서방님이라 부르며 죽어가고 있었다.

앗뿔사, 신립은 자신이 얼마나 큰 잘못을 저질렀는지를 그제야 깨닫았다.

뒤돌아 달려갔을 때는 모든 게 불에 타있었다.

처녀도 집도....

이어 권율이 입을 열었다.

역시 사냥 길에 올랐었다.

사냥에 빠져 어디를 얼마나 헤멧는지 날이 어두웠다.

정신을 차렸을 땐 오밤중이었다.

어디가 어딘지 분간조차 할 수 없는 상황이라서 골짝따라 아래로 아래로

내려만 갔다.

한참을 개울따라 내려 걷다보니 불빛이 눈에 들어왔다.

불빛이 새 나오는 집은 다 쓰러져 가는 오두막이었다.

그래도 하룻밤은 유할 수 있겠다싶어 안도의 숨을 쉬고

주인을 찾았다.

문이 열렸다.

주인은 이상하게도 외면하고 권율을 대하였다.

그런 주인은 하룻밤 신세 질 것을 청하는 권율을 별 경계심이나

거부감 없이 맞아 들였다.

주인은 혼자였다.

종일 사냥길에 허기진 그에게 주인은 새로 밥을 지어 상을 들고 들어왔다.

가는 호롱불 아래 주인의 얼굴을 본 권율은 흠칫했다.

얼굴이 추하다 못해 흉측하고 징그러웠기 때문이다.